벽골제, 고려 인종, 수리시설, 유신지교, 산천비보도감, 김제현, 이자겸, 묘청 사제(沙堤)
Issue Date
2023-04-30
Publisher
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
Citation
박종기. (2023). 고려 인종대 벽골제 증축과 훼손의 배경과 의미. 전북학연구, 8, 1-26.
Series/Report no.
전북학연구; 제8집
Abstract
이 연구는 고려 인종 때 벽골제 증축과 훼손의 원인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한 연구이다. 1143년(인종21) 증축된 벽골제는 3년이 지난 1146년(인종24) 훼손되었 다. 인종 때 벽골제 증축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인종은 이자겸과 묘 청의 난 등 내란을 극복한 후 김부식 등 유교 관료집단과 함께 유교 정치이념에 입 각해 민생 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벽골제 증축은 인종이 시행한 권농 정책의 산물이었다. 또한 12세기 이후 농업기술의 발전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라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벽골제 증축은 농업생산 증대를 위해 수리시 설을 본격적으로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벽골제가 증축된 인종 21년(1143) 전국 에 걸쳐 군현 개편이 있었다. 벽골제 소재지인 김제현을 주현으로 승격하고 주변의 영세한 속현을 김제현에 소속시켜 김제현의 현세를 보강해 그 위상을 크게 높였다. 이러한 군현 개편은 김제현의 위상을 높여 이 지역을 개발해 농업생산의 거점지역 으로 삼아 왕조 재정의 주요한 근원으로 삼으려는 정책이었다. 인종 때 벽골제 증 축의 또 다른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한편으로 벽골제 증축은 많은 인력이 동원된 국가적 규모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노동력 징발로 인해 많은 민원이 발생했다. 완공 후에도 수리 시설의 혜택을 둘러싸고 계층과 지역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이었다. 벽골제 가 증축된 후 3년 만에 훼손된 것은 이러한 대립과 갈등 때문이었다.
목차
1. 머리말
2. 벽골제 훼손의 배경과 원인
3. 벽골제 증축의 배경과 군현 개편
4. 맺음말
참고문헌